중세유럽의 기독교는 봉건 사회와 손을 잡고 꾸준히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결국 서 유럽에서 정신적으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함께 교회는 많은 땅과 재물을 헌납 받아서 넓은 영토를 가진 봉건 영주가 되었다. 교회가 사회의 권력과 손을 자고 세력을 강화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교회의 성직자 중에선 타락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다, 마침내 성직을 팔고 사는 일까지 유행하게 되고,,
12세기와 13세기 법률책에선 중세 사회의 서열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회 신분은 모두 24계층으로서, 영주는 10위 이며, 국왕은 8위이고, 황제는 7위로 나타나있다, 1위에서 6위까지에서 하느님이 1위, 다음이 교황이며, 주교, 수도원장, 수녀, 사제등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 선출에 부정이 행해지고, 교회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등 나쁜 짖들이 저질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까지 되자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와 같은 부패를 뿌리 뽑고, 올바른 신앙을 되찾으면서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개혁 운동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개혁을 반대하고, 이에 화가 치민 교황은 기독교인들에게 황제를 만나지 말라고 명력하고, 하인리히의 신하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무시하게 된다.
또한 황제의 반대파 제후들은 황제를 파문시키고 만약 1년 안에 파문에서 물려나지 못할 때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고 뜻을 모으게 된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할 수 없이 교황에게 무릎을 꿇게 되고, 3일 낮고 3일 밤 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용서를 빌게 되는데, 바로 이 사건이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