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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역사

조선건국 배경, 황산대첩! 이성계의 조력자 이지란(퉁두란)과 의형제를 맺다

by show쇼 2021. 2. 8.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임금이 되었을때 태조는 퉁두란에게 이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지란이라고 하여 이지란이라고 불렀다, 이지란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꼼꼼한 성격이어서 하는 일에 실수가 없었다,

이성계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고려 최영 장군이 동북 쪽의 쌍성을 칠때였는데, 고려군이 원나라 군사를 쫒아내기 위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춘은 아들인 이성계로 하여금 성문을 활짝 열어 놓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군은 쌍성을 순식간에 되찼았고 이자춘과 이성계는 그 공으로 개경으로 와서 공민왕으로부터 서북면 병마사의 벼슬을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성계는 원나라에 빼았긴 동녕부를 다시 찾고 홍건적을 무찌르고 왜구를 정벌하는 등의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이성계는 의동생인 이지란과 함께 언제나 싸움터로 나갔으며, 많은 일화를 남기게 되는데,,,

 

고려 우왕6년, 1380년 8월

왜구의 장수인 아지발도가 거느리는 왜구 5천 명이 전라도에 쳐들어와 여러 마을을 도륙할때 아지발도는 나이 불과 십오륙 세 밖에 안되는 소년으로 얼굴이 마치 여자와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무예 수준은 몹시 뛰어났다.

고려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전만 되풀이 하고, 이 소문을 들은 고려왕은 정몽주를 보내어 왜구를 무찌르게 하였다.

이성계의 군사가 운봉에 이르렀을때, 고려군은 왜구와 큰 싸움이 시작되었고, 아지발도는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마치 성난 사자와 같이 날뛰었다고 한다. 이지란이 급이 말을 몰아 맞싸웠는데, 이때 이지란은 적장을 쉽게 보고 있었다. 그는 아지발도의 무예와 용맹을 당해내지 못해 그만 물러서고 만것이다.

뒤를 이어 고려의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그와 맞서 싸웠지만 모두 아지발도의 창에 찔려 죽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이성계느느 곧장 활을 당겨 이지발도의 얼굴을 향해 쏘았고,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창으로 쳐서 땅에 떨어 뜨렸다, 이성계는 또 하나의 화살을 쏘았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날쌔게 손으로 화살을 받아 꺽어 버린 것이다.

세번째 화살은 몸을 옆으로 비켜 피하곤 하였다.

이성계는 군사들을 불러 들인 뒤 성문을 굳게 닫았고, 그리곤 이지란을 불러 저 장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죽이기는 아까우나 그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꾀를 부려 그를 거꾸러 뜨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내일 싸움은 내가 일러 주는대로 하여라,,

 

 

이튿날 동이 트고 전투는 다시 시작 되었다.

이성계는 활을 잘 쏘는 군사 서너명을 뽑아 적장 아지발도를 향해 활을 쏘게 하였고, 자신은 이지란과 함게 그들의 뒤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지발도가 비 오듯 날아드는 화살을 창으로 치고 손으로 받기에 정신이 없자 이지란에게 조용히 말한다.

'네가 활을 쏘아 저 장수의 투구 끝을 정통으로 맞추어라.' 그 다음엔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지란은 곧장 화살을 날려 아지발도의 투구 끝을 맞추었다.

이 순간 이성계가 쏜 화살은 그의 목을 꿰뚫었고, 그는 목에 화살을 맞고 말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왜구들은 아지발도가 죽자 싸움을 멈추고 급히 아지발도의 시체를 거두어 달아났다.

이성계는 곧장 공격 명령을 내렸고, 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왜구 6천명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는 전멸 시켰다고 한다.

이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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