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 원인과 진행과정, 사라예보사건 이후의 유럽 분위기
사라예보사건이 일어난지 한달 후인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물론 이 분위기에서는 세계대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3차 발칸전쟁이라고 할 만한 전쟁 분위기였죠,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세력 균형이란 나라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인데,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관련 국가들은 점점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세르비아의 지원국인 러시아가 참전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 역시 참전합니다.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도 참전하고, 일본역시 영.일 동맹을 구실로 참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1차세계대전으로 확산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전을 위한 슐리펜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우선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후 러시아를 격파한다는 작전으로 또한 프랑스를 공격할 때 독일과 프랑스 국경을 직접 넘어 공격하는 것이 아닌 중립국인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서는 당연히 프랑스군이 방비를 튼튼하게 해놓고 기다리겠지만, 중립국인 벨기에와의 국경은 방비가 허술할 것이디 때문이었죠, 하지만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입한 일은 영국이 참전하는 구실을 주게 됩니다.
독일군은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킬 수 없었는데, 벨기에는 거쳐 프랑스로 침입한 독일군은 마른 전투에서 패하여 그곳에서 발이 묶이게 됩니다. 동쪽 국경에서는 러시아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을 지키고 있던 독일군이 탄넨베르크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저지하였고 그결과 서부전선, 동부전선 모두 교착상태가 되게 됩니다.
당시 독일 남자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앞다투어 자원하여 전장으로 향했으며 그때까지 전쟁 반대를 외치던 사회민주당 조차 전쟁 긍정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국제 노종자 조직이었던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으며 무기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대체로 참호속에 숨어 싸웠습니다.
가끔 공격을 위해 진격하기도 했지만 금세 다시 참호 속으로 숨는 그런 게릴라전이 었던 것이죠,
참호에는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게 됩니다. 그래서 위생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피부병이 만연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영웅적인 전쟁의 모습을 찾아볼 수 는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개죽음만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물론, 군인 한 사람의 죽음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영.일 동맹을 구실로 이 전쟁에 참전한 것은 중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이 탐났기 때문으로, 독일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중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탐났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그 틈을 노려 1915년에 중국의 위안스카이정권에 21개조요구를 강제 승인시켰지만 이 21개조는 전쟁이 끝난후에 다시금 문제가 됩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의 가맹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미회수의 이탈리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15년에 런던밀약ㅇ르 맺고, 미회수된 이탈리아의 병합을 조건으로 삼국동맹을 파기하고 삼국협상 측에 참전합니다.
1916년 독일은 베르됭을 공격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솜전투에서 공세를 취했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1차세계대전은 장기전이 되어 군대의 힘 뿐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 무렵, 전차와 독가스, 전투기와 폭격기와 같은 신무기도 등장하게 되고, 영국은 솜전투에 최초로 전차를 투입했는데, 전차는 참호를 넘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한궤도를 갖추고 있어 큰 위용을 과시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의 전차는 비밀 유지를 위해 '탱크'라 불렸는데, 지금도 전차를 탱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