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카노사의 굴욕 사건의 배경과 중세 유럽의 분위기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사회 구성을 하는 핵심으로는 크게 봉건 제도와 가톨릭 교회였다. 성직자 임명권이 황제나 군주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성직자들이 타락하기 시작하고, 10세기 말부터 수도원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당시 양대 권력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이 11세기 후반부터 서임권(성직자 임명권)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즉, 서임권을 갖고 황제와 교황이 싸우면서 교황이 결국 승리하게 된 사건이 바로 '카노사 굴욕'이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금지, 교황에게 서임권이 있다는 칙령을 내리게 되고, 이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듬해 1월 보름스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이때 제후들과 성직자들이 교황의 편을 들자, 폐위될 것을 두려워한 하인리히 4세 교황에게 용서를 빌기로 한다. 1077년 겨울, 하인리히 4세 교황이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카노사 성으로 찾아간다. 또한 4일 동안 카노사 성의 밖의 눈 속에서 용서를 빌어 사면을 받아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 이후에는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강화한 뒤, 그레고리우스 7세를 추방하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 자리에 앉혔으며,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1122년에 교황은 성직자를 임명하고, 왕은 성직자에게 권한이나 특혜를 주는 것으로 '보름스 협약'을 맺어 서임권 논쟁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