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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역사

대한민국 근대사,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정권교체 그리고 남한과 북한)

by show쇼 2018. 9. 5.

대한민국 근대사,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정권교체 그리고 남한과 북한)




한국전쟁(6.25)의 휴전협정 이후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의 원조를 받아 경제적 자립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갑니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명마' 라는 고사에서 따온 '천리마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남한을 원조해준 나라는 미국 뿐이었는데 그 원조마저 삭감되자 남한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면서 국민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국민의 불만을 누르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정치를 강행하였고 하지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쟁 후보가 의문사를 하는 등의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한층 더 고조되기 시작 합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서울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봉기한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정권은 이내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 군인 이었던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고 결국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박정희정권은 경제 재건에 필요한 자금과 지술을 획득하기 위해 완강한 반일 여론을 누르고 1965년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 중.소 대립과 미국의 중국 접근 정책으로 고립되어 갔습니다.

때문에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에 적용하여 발전시킨 주체사상(조선노동당 및 조선민주우의인민공화국의 지도지침이 된 사상이다. 1960년대 후반에 김일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 현실에 적용한 것으로 1970년대에 들어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 되었다) 으로 국민의 결속을 꾀했습니다.


1972년에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자주통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원칙이 확인되었는데 하지만 남북한 모두가 국내적으로 정권의 기반을 더욱 강화해 나갔습니다.

남한에서는 유신헌법이 제정되어 대통령의 권한이 강대해져 갔고,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대한 의존도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반정부운동은 무력으로 탄압되었습니다.


당시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일본에서 체류하던 중 납치되는 사건도 일어났고, 북한에서는 1972년에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취임했으며 아들 김정일에게로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세습 준비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인 KCIA(중앙정보국) 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이 고조돼고 이듬해 전라도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봉기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군인 출신이었던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한층 고양된 1980년대의 민주화 요구로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때의 선거 열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고향인 광주에서 연설 했을 때는 그야 말로 세계적인 콘서트와 같은 열기를 뿜어져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당에서 입후보한 김대중과 김영삼이 협력해 단일 후보를 냈다면 승리가 확실했겠지만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대통령 선거 직전, 아직도 의혹에 쌓여 있는 대한항공기폭파사건(1987년 한국의 대통령선거 직전에 대한항공기858편이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김승일, 김현희에 의해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세계 각국의 88서울올림픽 대회 참가 신청을 방해하고 한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할 목적으로 치밀한 계획 끝에 일어 났다고 발표 되었다. 여객기를 폭파한 뒤 피신하던 두 사람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독약을 삼켜 김승일은 사망, 김현희는 살아났다. 그 뒤 김현희는 한국에 전향하였고, 대통령 특별사면 조치로 자유인이 되었다.)이 발생해 북한 공작원으로 발표된 김현희가 폭파범으로 체포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위협을 부각시키려는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해 결국 노태우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노태우정권 시대인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이것을 계기로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접촉하게 되어 소련, 중국과 수교하였으며,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게 됩니다.

북한은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 후인 1997년 김정일이 노동당 총서가 됩니다.

한국에서는 1933년에 김영삼, 1988년에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총비서와 회담을 가지게 되는데,,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 양국 선수는 통일선수단을 결성해 개회식에 함께 입장했지만, 한반도가 통일 되기까지는 아직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이며, 정권은 또 다른 교체로 모든 것이 또다시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