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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역사

한국전쟁(6.25)의 배경과 전개 휴전협정, 그리고 결과

by show쇼 2018. 9. 4.

한국전쟁(6.25)의 배경과 전개 휴전협정, 그리고 결과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갑자기 남침을 시작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북한의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한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단숨에 한반도를 무력 통일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이 우세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은 서울만 점령한다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 단기 결전을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들의 군대가 승리한다면 남한 사람들이 봉기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정 반대의 성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봉기는 커녕 사람들은 피난 가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북한군은 전세를 몰아 더욱 더 밀어 붙이면서 부산 가까이까지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정보망을 동원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계획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내버려 둔 다음, 일거에 반격을 할 계획이 있었다는 설도 나돌고 있습니다.

1949년에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중국을 상실'했고, 한국전쟁(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에는 매카시(위스콘신주 출신의 상원의원이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당원이 있다 다로 연설하였으며,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수립을 배경으로 일어난 매카시선풍으로 공산주의자 외에 많은 자유 주의자가 공작에서 추방되고 탄압을 받았다. 1954년 상원의 비난결의를 받고 영향력을 잃었다) 상원의원의 유명한 '매카시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자 미국은 국제연합 안정보장이사회에서 국제연합군을 파병하기로 결정 합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국제 연합의 중국 대표로 삼자고 주장했지만 반아들여지지는 않자 안전보장이상회에 불참합니다.

이때 중국대표권을 가진 것은 타이완의 국민정부였으며 만일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했었다면 거부권을 행사해 국제연합군의 파병이 이루어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파병된 국제연합은 모두 16개국의 군대로 편성이 되었지만 미군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에는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고, 인천에 상륙한 국제연합군은 보급로가 차단된 북한의 군대를 물리치면서 중국의 국경까지 단숨에 밀고 올라가게 됩니다.

이런일이 생기자 결국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전년도에 건국한 중국은 출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정규군도 아닌 의용군 형태의 군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결국 한국전쟁에서는 국제연합군 형태의 미군과 의용군 형태의 중국군이 결판을 짖게 되었습니다.

전투 장비에 엄청나게 열세였던 중국의용군들은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국제연합군(UN)은 38도선까지 다시 필려 내려와 교착 상태가 계속 됩니다.

이 무렵의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중국 공군기지를 원폭으로 공격하고자 주장해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이 되었습니다.





결국 소련의 제안으로 1953년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맺어 집니다.

이 결과 북위 38도선과 비스듬히 교차하는 군사분계선에 의해 남북이 또 다시 분단 되었고, 그 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씩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수 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한 북한과 남한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 만이 남게 되었죠,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민족으로서 이것은 엄청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