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정권 탈취와 유대인 차별 정책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둘러싸고 1924년에 도스안이 성립되었습니다.
미국의 재무장관 찰스G. 도스가 중심이 되어 미국 자본을 독일에 도입하기로 했고, 이로써 배상금 문제가 호전되었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벨기에군이 루스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독일은 유럽 국가들과 로카로노조약을 맺었고, 이듬해에는 국제연맹에도 상임이사국으로 참가했습니다.
나치는 1928년에는 국회에서 12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군소정당에 불과했는데, 1929년에 도스안을 수정한 영안이 성립되면서 배상금 금액은 358억금 마르크로 감액됩니다.
하지만 그 해 세계경제공황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미국자본이 독일에서 회수되자 독일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듬해 나치는 의석을 107석으로 늘려 의회에서 제2당으로 올라섰고, 1932년에는 제1당이 됩니다. 그 해에 열린 로잔회의로 배상금 금액은 또다시 30억 마르크로 내려갔고 1933년 1월, 연립정권이기는 하지만 마침내 히틀러내각이 성립됩니다.
나치는 2월에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공산당원의 범행으로 몰아 선거에서의 공산당의 득표를 무효화해서 3월에 전권위임법을 성립시키고, 그 밖의 정당을 불법화하여 나치독재를 실현하게 됩니다.
이듬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의 당수이자 수상, 그리고 대통령을 겸해 총통이라고 칭했습니다.
이처럼 나치는 세계경제공황을 계기로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여 정권을 잡았습니다.
더구나 무력에 의한 쿠테타가 아니라 표면상 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잡은 것입니다.
독일 국민은 이러한 나치스와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는데, 현대 대중사회의 특징은 '다양하면서도 획일적' 이므로 국민 각 계층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나치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자본가는 공산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끼고, 공산당에 대항하는 정치 세력으로 나치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공황으로 타격을 받은 중산계급은 어찌 됐든 경기회복을 바랐고, 나치도 군비 확대나 공공사업으로 그에 부응했습니다
또한 노동자 중에서 말단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도 나치를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고, 농민은 유대인 금융업자에게 부책 있었기 때문에 나치의 반유대주의 주장에 공조했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나치를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차별 정책
나치는 정권을 잡자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건설합니다.
최초의 강제수용소는 뮌헨 교외에 있는 다하우에 세워졌는데, 그리고 유대인도 그 곳으로 보내집니다.
나치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은 열등 민족이고, 독일인 같은 게르만 민족은 우월한 인종이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는데, 하지만 이것은 나치가 창안한 것이 아닌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일 나치가 증폭시켜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공동의 적을 가졌을때 집단은 단결한다.
독일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열등한 민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1941년 이후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 즉 '유대인 말살'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었던 말살 수용소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