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아가도(스파르타쿠스_트라키아인)의 십자가 행렬
검투사 드라마로 인기가 많은 트라키아인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옵니다.
전해오는 전설로는 그는 트라키아의 왕자였다고 하는데요, 노예가 된 그는 광산에서 일하던중
카푸아의 바티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카푸아에는 검투사 양성소가 여러군데 있었죠,,
그때의 검투사 양성소는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었던 듯한데요, 철학자 키케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손꼽히는 지식인었던 아타쿠스도 검투사 양성소를 운형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성소의 가혹한 훈련과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7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여 베수비오스산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을 기지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주인의 가혹한 채찍도, 비인간적인 대우도 없었던 평등한 평화로운 새보금자리를 만들고 그들은 미래를 위해
싸울 전비를 해나가게 됩니다.
베수비오산 남쪽의 캄파냐 지방에는 대농자들이 많았는데, 때마침 기근이 들어 노예와 파산한 농민들이 속속
스파르타쿠스의 집단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봉기군은 단순한 도망노예들이 아닌, 귀족과 노예소유주들이 판치는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한 희망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72년 봄, 스파르타쿠스를 앞세운 봉기군은 12만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사기는 날로 높아져 갑니다.
로마는 집정관 2명이 지휘하는 4개 군단을 투입하였지만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이들을 멋지게 격파하고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일대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봉기군은 여기서 다시 남하하게 되는데,, 포 강 일대의 자유농민들이 강력하게 저항한데다가 우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진군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71년,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가려던 봉기군은 함께 싸우기로 한 그리스 인들의 배신으로 로마의 포위망에 걸려
들로 말았습니다. 힘겹게 아드리아 해안 부룬티움으로 퇴각했지만 크라수스가 이끄는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아폴리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의 주력부대가 전멸당했으며, 패주한 5천여명도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포로로 잡힌 6천여명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의 십자가 행렬은 무려
수십리에 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전사하였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