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이(栗谷 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율곡이이는 성리학의 원체인 세상만물에 대한 '이기(理氣)'에 대해 말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분하였으며 '이기'의 관계성을 군신에 비유히 '이'의 우위를 강조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던 이황과는 달리, '이기는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는 상화 화합성을 강조하여 이기는 서로 떨어질수도 없으며, 서로 섞일수도 없는 것이라는 뜻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율곡이이(栗谷 李珥)는 당시 유학에 뜻을 두고 배움을 지속하면서 유학의 사상을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정치와 삶에 적용하고자 노력하였는데요, 자신의 성리학적 견해를 펼칠때도 현실에 기반을 둔 시기적절한 실질적인 업적과 효과를 강조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경우는 성현이 다스린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이는 정계진출 초기부터 비리세력에 대한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당시의 왕실의 외척이었던 윤원형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의기를 보였으며 선조에게 "동문호답"을 지어 올리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악법을 지적했으며, "시무삼사"를 통해 정치의 근본을 세울것, 어진 인재를 등용할것,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해 올렸습니다.
그리고 "만언봉사"를 통해 정치와 사회풍습의 폐단을 지적하는 의견을 상소해 올려서 선조의 두터운 신임과 함께 극찬을 얻었던 율곡이이는 선조가 성군이 되는 것을 기원하며 사서의 가르침과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성학집요"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층이었던 사람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당쟁을 거듭하고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며 백성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지경으로 이르렀으며 국방력 또한 날로 무력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구나 선조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정치적인 혼란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는데 율곡이이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자 황해도 해주 석담에 은거하며 어린이를 계몽하기 위한 "격몽요결"과 기자의 행적을 기록한 "기자실기"등을 저술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