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나폴레옹의 전투식량? 발병가는 영국의 주석 기술자 피터 듀란드
통조림 발명의 최대 공로자는 나폴레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군대의 장기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음식물의 장기 보관이 가능한 방법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1만2000프랑을 지급하겠다는 현상 공모를 내걸었습니다.
1만2000프랑이면 지금 화폐로 1억 원이 넘는 돈이었죠,,
파리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니콜라 아페르라는 사람이 나폴레옹을 찾아왔는데 아페르가 가지고 온 병 속에는 고기와 야채를 섞어 조리한 음식이 신선한 상태로 들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페르에게 병 속에 들어 있는 야채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페르는 3주 전이라고 대답했고 음식물의 신선도를 확인한 나폴레옹은 즉석에서 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아페르의 발명품은 통조림이 아닌 병조림이었던 것이죠,
고기와 야채, 달걀 등을 섞어 적당히 칼로리와 영양소를 맞춘 음식을 병에 넣고 밀봉한 뒤 끓는 물에 넣어 삶아낸 것으로 병마개로는 코르크를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간단한 방법 같지만 아직 세균의 존재도 모르고, 음식이 부패하는 원리도 알지 못하던 시절이라 그야말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방법이었는데 아페르는 나폴레옹이 현상 공모를 하기 전부터 음식 보관법을 연구했는데, 이 방법을 찾아내는 데 무려 15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조림은 나폴레옹 군대에서는 별로 실용화되지 못했는데 무겁고, 잘 깨지고, 음식물의 보존 상태도 생각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아페르는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병조림 공장을 짓고, 계속해서 요리법을 연구해 제품을 생산하려고 했지만, 1814년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파리로 진군한 러시아 군대에 의해 공장이 불타버리고, 이렇게 해서 선구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페르와 병조림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불편한 병조림을 실용적인 통조림으로 개량한 나라는 나폴레옹의 숙적이던 영국이었습니다.
통조림 발병가는 영국의 주석 기술자 피터 듀란드 였습니다.
그는 평소 공장에서 일을 할 때 간편한 병조림을 즐겨 먹곤 했는데,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점심을 먹기 위해 병조림을 꺼냈지만 너무 차가워서 주변에 있던 깡통에 내용물을 쏟아 붓고 난로에서 끓이기로 했습니다.
그 순간 듀란트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병 대신 깡통을 용기로 사용해 조림 음식을 만들면 깨질 염려가 없을뿐더러 음식을 데워 먹기에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 즉시 발명에 착수한 듀란트는 ‘주석 깡통을 이용한 식품밀봉용기’라는 이름으로 1810년 특허를 따냈으며,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조림’ 입니다.
하지만 듀란트는 통조림의 기업화에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당시만 해도 통조림 뚜껑을 일일이 납으로 땜질하는 수작업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요즘처럼 통조림 뚜껑을 딸 수 있는 ‘깡통따개’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라서 통조림을 따기 위해서는 끌이나 망치 등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통조림 대중화의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깡통따개가 발명된 것은 1858년 미국인 에즈라 워너에 의해서였다. 날카로운 칼날과 보호 장치로 구성된 깡통따개가 등장한 이후 미국 남북전쟁과 1차․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통조림 기술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요즘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터치캔’은 1959년 미국의 에멀 프레이즈에 의해 발명됐다. 뚜껑에 달린 고리를 살짝 잡아당겨 통조림을 열 수 있는 이 발명품은 에멀 프레이즈가 자동차 보닛을 보고 얻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것. 평소 통조림을 즐겨먹던 그는 보닛을 올리듯 통조림 뚜껑을 손으로 뜯어낸다면 따개가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발명에 매달려 편리한 원터치캔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통조림의 탄생 배경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폴레옹이 억대의 현상금을 걸고 음식물의 장기 보관에 관한 아이디어를 공모한 이유는 병사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보급하기 위해서, 또는 유통 기한이 짧은 신선한 식료품을 조달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식량 조달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승전 비결 중 하나는 프랑스군의 기동력이었습니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이 기동력의 비결은 병사들의 강행군이었는데, 속도를 유지하고, 행군 부담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군은 텐트도 휴대하지 않았고. 숙박할 민가가 없는 야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나뭇잎을 덮고 자야 했습니다.
야지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고 자야 하는 병사들의 고통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런데 이 억센 병사들에게 텐트보다 더 중요한 장비가 있었으니 바로 냄비였습니다. 냄비야말로 필수 생존장비. 병사들에게는 검은 빵과 고기, 야채, 곡류 등이 지급됐는데,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나폴레옹군의 보급 체계와 조직은 상당히 우수해서 병사들에게 식료품이 정량대로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규정상의 정량이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고기 1파운드라고 하면 무게는 정확히 1파운드였지만, 고기의 질은 형편없었고, 거의가 뼈와 힘줄, 내장까지 포함해서 1파운드였습니다. 이것을 냄비에 넣고 삶아서 국이나 찌개(스튜)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쌀과 야채도 생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냄비에 넣고 삶아야 했습니다. 유일하게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은 빵이었는데, 그것도 이론상만이지 검은 빵은 너무나 딱딱해서 고기와 마찬가지로 찌개에 넣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식료품은 재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냄비에 쓸어 넣고 잡탕 스튜로 만들어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배낭 위에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는 냄비가 필수적인 생존 장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잡탕 스튜를 만들려면 냄비와 더불어 땔감이 필요했다. 땔감 재료가 어디든 있을 것 같지만, 이것 역시 구하기 어려웠고, 수천, 수만의 군대가 끼니마다 사용할 나뭇가지와 장작을 구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군대가 야영지에 도착하면 단 하루를 머물더라도 일단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고, 숙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지만 이 작업 때문에 해가 진 뒤에도 쉴 수가 없었고 적이 근접해 있다면 진지 구축은 생사를 좌우하는 과업이 되고, 금세 대규모 공사로 변합니다. 이런 절박하고 피곤한 상황 중에도 상당수 병력이 땔감 조달에 투입돼야만 했는데 게다가 이런 부대는 진지 주변으로 흩어져 멀리까지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적의 기습 부대나 유격 부대에게 늘 일차적인 먹잇감이 돼곤 했스니다. 중국 병서를 보면 이런 부대를 운용하는 규정, 신호 체제, 훈련 방식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그만큼 이들의 임무가 중요하면서도 힘들고 위험했습니다.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수천 년간 전쟁터의 모든 장수들이 갈망했던 소원은 식료품의 장기 보관이 아니라 조리가 필요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 음식, 즉 효율성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땔감 조달 부대를 운용하는 복잡함과 위험을 덜고, 이들을 진지 구축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체력을 절약하고, 진지를 더욱 견고하고 빠르게 구축하며, 시간 낭비를 줄여 행군 속도를 2배로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또 하나 엄청나게 중요한 장점이 있었는데,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의 약탈 행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군대는 홍수나 태풍보다도 무섭게 마을을 초토화시켜 버린다는 말이 있었는데 병사들이 귀중품이 아니라 한 끼 내지는 단 며칠의 식사와 그것을 조리할 수 있는 땔감만을 조달해도 마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식료품은 모두 징발하고, 건축물과 가구는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현지 조달은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고,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북돋우는 수단도 됐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약탈과 난폭 행위는 점령국에 대한 적개심과 항전 의지를 불태웠고, 군기를 무너트려 병사들의 질을 크게 저하시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통조림을 알면서도 별로 애용하지 않았는데 가혹한 전쟁터였지만 식사만이라도 최대한 일반적 관습에 가깝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더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