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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역사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작품세계 바로크 미술

by show쇼 2017. 11. 11.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작품세계 바로크 미술




17세기, 당시 대다수의 유럽 바로크 미술이 귀족들을 위해 궁정과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네덜란드의 미술은 대중의 일상생활을 풍자한 풍속화와 초상화, 풍경화 등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술작품의 수요자에 의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네덜란드의 미술품 수요자는 경제의 발달과 함께 재정적 여유가 생겨 새롭게 사회 주도층으로 진입한 신흥 자본자들이었습니다.





렘브란트



반면, 다른 유럽 국가들의 미술작품 수요층은 전통적인 보수 귀족들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17세기의 바로크 미술을 귀족적인 바로크 미술과 대중적인 바로크 미술로 구분하는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귀족적 미술의 대표주자가 루벤스였다면 대중적인 바로크 미술의 대표로 남은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입니다.




그는 당시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그들을 뛰어넘으려는 야심을 품었는데 진지한 주제를 다루려고 노력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에 뒤지지 않는 기교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학구적이고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는 화가로서의 입지도 굳히기 시작합니다.



렘브란트

렘브람트 : 돌아온 탕자 (1669년작)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둠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보는 사람의 시선을 유도하는 특징이 있는데 마치 사진과 영화를 제작할 때처럼 조명을 비추어 반사되는 주제를 풍부하고 화려한 귀족적 빛으로 돋보이게 하고 어둠 속에 묻힌 희미한 서민적 배경은 을씨년스러운 공허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마치 렘브란트 자신의 일생을 관통했던 화려한 명성과 현실의 그늘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명성을 빛나게 하고 현실적인 생계의 수단이 되었던 것은 초상화를 그려서 인데, 그는 비싼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지만 화가로서의 예술적인 욕망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고객이 원하는 그림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태도는 고객으로부터 외면을 받게되었고 이런 이유로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마음은 우월감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숨기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초상화가로서 기교를 연마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자화상에는 자신의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의 초상화가들이 자신의 고객을 돋보이게 하는 근엄함이나 화려함으로 치장하는 동안에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고객이 원하는 그림에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화가의 전형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고객들은 젊은 초상화가에게 고개를 돌렸고 만년에 그는 다시 이젤 앞으로 돌아와 자신의 늙은 모습 위에 현실에 굴복할 수 없는 화가의 자존심을 깊이 새겨 넣었습니다.


렘브란트

야경(1642년) : 캔버스에 유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가 죽었을때는 얼마 안되는 자신의 장례비조차 친구가 내줄 정도로 힘겨운 삶이었지만 화가로서 미술사의 거장들과 당당히 겨루고 싶어했던 그의 야망은 오늘날 미술사에서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라는 명예를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렘브란트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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