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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역사

인조반정, 그리고 유배된 광해군 1623년의 조선

by show쇼 2017. 10. 10.

인조반정, 그리고 유배된 광해군 1623년의 조선


광해군은 1623년 서인등의 일파가 주도한 정변으로 인해 폐위되게 됩니다.

인조반정은 1620년경 부터 추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무신 이성, 신경진 등이 계획을 세웠으며, 김류, 김자점, 이귀, 최명길 등의 문신들이 동조하였으며, 이귀는 반정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조반정, 광해군유배, 1623년



인조반정을 모의한 서인 일파는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하고 이 반란의 음모는 광해군 14년(1622) 말에는 조정에도 알려지면서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꾀하니 체포하여 국문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되죠


하지만 그의 치세 중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가 주도한 여러 옥사에 지친 광해군은 이 일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 야밤 홍제원에 있는 장만의 집에 모인 반란군은 200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반정을 지위하였던 김류도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장단에서 오기로 한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류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였는데, 반란군은 다급한 나머지 이괄을 총 책임자로 추대하고 서둘러 영천 고개를 넘는데,,,

모화관에 이르렀을때 김류가 올라왔고 심기원이 200여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게 됩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종이 연서 역으로 나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이끌고 온 군사 700여 명을 맞이하여 도성으로 들어오고, 거사에 가담한 군사는 모두 1,400명 정도로 궁궐의 호위 책임을 맡았던 훈련대장 이흥립이 마지막에 가담하면서 인조반정은 성공하게 됩니다.



인조반정, 광해군유배, 1623년




# 인조반정으로 유배된 광해군


이 정변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에 대해 배은망덕했으며 후금과 통호했다는 것으로 신정권의 맹목적인 사대정책은 두 차례에 걸친 후금의 침략을 초래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8년)에 태어났으며 이연의 2남으로 모친은 공빈 김씨로 또한 임해군은 광해의 동복형입니다.


1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이연은 황망히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데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연은 어느 날 서자들의 기상을 보기 위해 그들을 불러 보물을 펼쳐놓고 마음대로 골라 갖게 하였는데 다른 왕자들은 서로 보물을 차지하려 했지만 유독 광해군 만은 필묵을 가졌던 것, 또한 이연이 여러 왕자들에게 반찬 중 어느 것이 가장 귀하냐고 물었을때 광해군은 서슴치 않고 소금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연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광해군은 모든 음식에 소금이 빠지면 그 음식이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연은 다시 광해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광해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원통하게 생각하낟고 말했다 합니다.(공빈김씨는 1577년, 광해군이 3살때 별세하였음)





18세의 어린 세자의 몸으로 임진왜란을 맞은 광해군은 강원도 일대에서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국란을 겪고 명군의 횡포를 목격하면서 민이 원하는 것, 위정자들의 무책임과 명예에 대한 사대의 무익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광해군은 외교 면에서도 용의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군비강황에도 힘을 기울여 축성과 병기의 수리, 군사 양성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궁실의 재정이 어려운 중에서도 사고관리와 많은 서적을 인쇄, 간행하였으며, 조선 최대의 의서인 "동의보감"편찬도 광해군의 업적중 하나 입니다.


인조반정, 광해군유배,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목대비는 교서에서 그의 폐위 사유로 36개의 항목을 들었는데 대부분은 사실과 너무 거리가 먼 내용이었으며,

왕비 유씨와 왕세자는 사약을 받았고 왕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메어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37년 봄에는 제주도까지 유배를 가게 됩니다.


광해군은 인주 19년(1641) 6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제주도의 이름없는 골짜기 어느 곳에서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적석동에 묻혔고 조정은 조희를 3일간 폐하여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광해군의 정책이 옳았다고 인정하여 그랬던 것이었는지, 그의 유배생활 19년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 인조반정 이후의 반정 주도 세력의 횡포


인조반정후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벌어지게 되는데,,,

책형으로 처형당한 사람이 16명이고 사약 등으로 죽은 사람이 67명이었다고 합니다. 아이첨은 참형되었으며 그의 아들 4형제 승지 이원엽, 이조참의 이대엽, 승지 이홍엽, 대성 이기엽도 처형되었으며 손자 이영식은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후금과 연락 업무를 맡았던 평안병사 박엽과 의주부윤 윤준을 명나라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처형등


모두 합쳐 3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거나 파직되었던 것이죠


어느 시대에서 정변을 일으킨 자들은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우는데 광해군을 축출한 무리들에 대한 평가는 이후에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이종이 임근이던 시절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반정 훈신 가운데 명망 있는 자가 많았으나 그 뒤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치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수하게 종묘사직을 위해 거사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최명길, 장유, 이해 등이 드러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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